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사/세금 제도 (문단 편집) == [[옹정제]]의 [[지정은제]]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4px-Middle-aged_Kangxi.jpg|width=200]] || || '''[[강희제]]''' || 청나라 [[강희제]] 50년(1711).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을 선포하였다. 즉 지금은 태평성세이기 때문에 이후로 늘어나는 정세는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것. 당시에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했다'''. 이는 '''엄청난 의미'''였다. 호구 수에 따른 세금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는데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애를 많이 만들어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당현종]]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면 한차원 높은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두세 폐지와 같았다.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금 수입이 줄어드는 효과가 되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호기롭게 실시한 정책 때문에 피를 보게 된~~ [[옹정제]] 시기에 세금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여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무(攤丁入畝)''' 방법을 적용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우선 지방인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성에서도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고, 이를 반대하는 요구가 극심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이 줄어들고 땅 가진 부자들에게 세금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를 했던 것이다. ||[[파일:external/a1.att.hudong.com/01300000358407125181588447138.jpg|width=200]] || || '''[[옹정제]]''' || 옹정 4년(1726), 향시에 응시한 천여명의 응시생 등은 단체로 시위를 하면서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다. 지정은제에 찬성하던 순무 이위(李衛)는 이들을 간단하게 때려잡아 처벌했고 그 후 2년 동안 지정은제는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을 거쳐 산서성에서도 시행되어 건륭제 연간에는 완벽하게 정착하게 되었다. 옹정 5년(1727),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 잡았다. 향신, 즉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관리나 유력인사 등의 사회 계층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다. 이들은 지세 납부에 계속해서 저항했는데 1727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는 혀를 내두르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 하기도 했다. >이 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격노한 옹정제는 진상 조사를 철저하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에 얼마나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안 좋았느냐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퍼져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예 향시의 시험에 나가는것을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다.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합하여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 옹정제는 아주 단호하고 극렬하게 이에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활동을 한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하겠다는 교지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400여 명의 공명이 모두 박탈되었다.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체포해서 [[코렁탕]]을 먹였다. 이런 엄청난 대응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지정은제는 확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강희제의 호구조사 당시 2,470만 명이었던 청나라 인구는 80여 년이 흐르자 무려 4억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이유는 인두세 부담이 줄어들자, 백성들이 호구조사를 기피할 이유가 적어졌고, 미등록인구가 대거 호적조사에 등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곡절 끝에 확립된 지정은제는 [[아편]]으로 인해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현상이 심해진 청나라 말기까지 제대로 동작하였다. 하지만 은의 유출이 심화되면서 은의 가치가 올라가 백성들이 세금을 내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청나라는 필사적으로 은의 유출을 막아보려고 애썼고, 아편이 마약이라 세금낼 사람들의 건강과 정신상태를 맛가게 만든다는 점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아편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펼쳤다. 그 결과 [[아편전쟁]]이 발생하였으며, 여기서 청나라가 패전함에 따라서 서구 열강들에 의한 중국 침략이 점차 속도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청나라의 부패 수준이 심화되면서 세제가 다시 문란해졌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세금 제도(중국 역사), version=11)] [[분류:세금]][[분류:중국의 역사]][[분류:중국의 구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